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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제육볶음을 만들었다.

ducja 2013. 9. 3. 01:44





 전구를 갈아낄 줄을 모른다는 핑계로 현관에 달린 이미 닳아 켜지지 않는 등의 전구를 그대로 두고 집에 들어올때마다 어둡다고 불평을 해대다가 결국에 전구를 갈아껴줄 사람을 찾았어. 그에게 떠넘기고, 드디어 현관문에 들어서자마자 스위치를 누르면 밟은 빛이 들어온다며 좋아했다. 어쩌면 내가 먼저 꼬셨는지도 몰라 그도 알고있을거야.

 매일 바쁜 그이, 가끔 같이 밖에서 비싼건 아니더라도 남들 다하는 외식 한 번 하고싶어서 물어보면 오늘은 늦어..내일도 12시가 넘을거야. 12시 넘어서 먹을데라곤 남자들만 바글바글한 돼지육수 냄새나는 라면집뿐인데...나두 평범하게 외출도 같이 하고 가족들이랑 연인들이랑 밀물를 타고 육지로 올라온 미역들 꽃게들처럼 모래위를 걷고싶은데 매일 바쁜 그이는 내일도 바쁘고 다음날도 바빠. 아마 죽을때도 바빠서 못 죽을거야.

 3초에 한 번씩 답변을 기다리며 휴대전화를 확인하는 내가 한심해서 내 일을 하자고 책상 앞에 앉으면 집중이 안되서 또 다시 울릴 일이 없는 휴대전화를 만지작 만지작. 12시, 1시, 2시쯤이 되면...일이 끝났다고 집으로 갈까? 하는 소리에 신나서 졸린 눈을 비비며 문 앞에서 꼬리를 흔들고 강아지처럼 냄새를 킁킁 맡으며 그이를 기다려. 먹지도 않을 먹지도 못하는 먹고싶어하지도 않을 제육볶음을 만들어. 미림에 절여놓은 돼지고기를 볶고 빨간고추를 얇게 썰어서 같이 볶아 그이를 미워하는 내 마음도 지지고 볶아 모두 연기로 날려보내. 향긋한 냄새가 올라올때 쯤에 휴대전화에서 알림 소리가 들려. 집 앞에 온걸까? 다행이다. 이제 막 다 만들었는데, 따끈하고 맛있는 제육볶음을 먹일 수 있겠다. 휴대전화를 열어 메시지를 확인해보니 못 온다는 소리뿐. 무슨 이유인지는 설명해주지 않아. 생각해보면 매일 이래왔어. 약속시간에 맞춰 약속장소로 나가 기다리면 제 시간에 오는 그를 만나기 어려워. 30분, 1시간이 지나도 연락이 없어. 나타나지도 않아. 땀을 뻘뻘 흘리며 그러구 서있어. '미안해 오늘 일이 늦어져서 못 만나겠는데? 다음으로 미룰까?' 뭐 그럴수도 있지...나는 어떤 경우에도 화를 낸 적이 없었다. 어쩌면 무의식적으로 화를 낼 필요조차 없는 일이라고 생각했을거야.

  나는 제육볶음을 쓰레기통에 버렸어. 설겆이를 깨끗이하고 집안 여기저기에 널부러져있는 그이의 물건들도 함께 쓰레기통에 넣었지. 칫솔, 일회용 면도기, 잃어버리고 가져가지 않은 양말의 남은 한짝, 먹다 남은 우유, 일하는데서 가져왔다며 씽크대 위 선반에 둔 맥주회사의 이름이 씌여진 영업용 컵 두 개, 아직 반들반들한 슬리퍼. 좁은 집에 이것저것 많기도 하네..쓰레기통에 물건들을 담다가 구슬이 담겨있는 상자를 엎었다. 예쁜 구슬들이 방바닥에 엎질려저 구석까지 굴러간다. 구슬들이 작아서 손에 잘 잡히지 않는다. 그래서 화가 나서 우는거다. 절대로 쓰레기통에 있는 쓰레기들을 버리는게 억울해서 우는게 아니다.

 현관문을 잠그고 체인을 걸어. 그이가 늦은 밤 도어락의 번호를 누르고 열린 문으로 들어오지 못하게 체인까지 걸어. 휴대전화에서 번호를 찾아 수신거부를 걸고 전화기를 꺼버려. 베란다 문도 잠그고 창문도 닫아버려. 아무 소리도 듣지 못하게 귀에 귀마개를 넣고 잠이 들어. 잠이 잘 오지 않지만 시끄러움으로부터 도망치기 위해 눈을 질끈 감고 귀마개를 더 깊이 쑤셔넣어. 우리는 이제 끝났어

 나는 제육볶음을 못 먹어. 너는 이걸 무척 좋아하지. 나는 평생 이 음식을 보면 너를 떠올릴거야. 시간이 지나면 우리가 잠깐 만났던 시간들도 기억에서 추억으로 변하고 그 추억도 아주 옅게 변할거야. 너는 후회하고 나는 홀가분하겠지. 나는 받을 수 없는 무언가를 영원히 기다리고싶지 않아. 이제 전구도 갈 수 있고 형광등도 내가 바꿔 낄 수 있어. 못질도 하고 냉장고도 움직여. 이제 나는 더이상 니가 필요없지. 그렇지만 너는 내 제육볶음이 필요할거야.







내가 아는 사람의 그저 그런 얘기..








48페이지짜리 이야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