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로즈 호텔

사랑해 말순씨

ducja 2009. 9. 19. 03:57



이건 지금은 없어진 스카라 극장에서 마지막으로 본 영화였다. 그 땐 굉장히 슬펐는데 그게 벌써 4년전이다. 내가 고등학교를 졸업하던때였으니까 아마 스무살때가 맞을거다. 언니랑 언니 친구랑 같이 차거운 바람 맞으며 갔었던 기억이 난다. 스카라 극장은 내가 가 본 데중에서 스크린 크기가 제일 크고 객석 수가 젤 웃기게 배치되있던 곳이었다. 아래 위로 나뉘어져 있어서 위에선 맨 앞에 대롱대롱 매달려서 볼 수도 있고 (중앙시네마나 서울극장도) 아래에선 압도적인 크기땜에 실감나게 볼 수 있다는게 장점이었다.
이 영화는..내가 굉장히 좋아하는 영화다..화장품 방판을 하는 말순씨는 광호의 엄마다. 광호는 여드름 나고 시커멓고 조그만 소년으로 간호사 일을 하는 하얗고 뽀얀 은숙씨를 짝사랑하고 있다. 광호의 엄마 말순씨는 빨간 립스틱을 바른 입술을 오물조물하며 수다를 떨고 무식을 티내는데 광호는 그런 엄마가 부끄럽다. 히히 넘 귀엽다. 말순씨도 광호도..
이걸 떠올리면 자꾸 나 국민학교 다닐때가 생각난다. 우리 동네 아줌마들은 대부분 과일 장사를 하거나 솜틀집, 혹은 화장품 방판등의 장사를 하는 사람이 많았고 동네에 흘러들어온 떠돌이들은 대포집이나 통닭집, 미용실을 여는 경우가 많았다. 우리 가게 뒷골목에 내가 친하게 지내던 언니네 엄마도 화장품 방판을 했었고 울엄마는 여러번 물건도 샀었다. 옆집 전파사 아줌마도 몇 번 속았고..그 아줌마네는 지체 장애를 가진 딸이 하나 있었다. 나를 보면 침을 흘리면서 디게 크게 웃었다. 그럼 나도 힘을 쥐고 구부러진 손가락을 잡으면서 같이 좋아했다. 동네는 작고 아담했다. 슈퍼집 딸 셋이 시집가는것도 우리는 다 봤고 미용실 아줌마 아들이 학교 가는것도 신사임당 책방 언니의 남자친구가 아주 여러번 빠르게 바뀌는것도 다 봤다. 도박으로 빚을 지고 도망간 아저씨도 봤고 똑같이 생긴 여자애 두 명과 남자애 한 명을 낳은 아줌마가 없어진것도 알았다.
연탄불을 지피면 아침이다. 밥솥의 뜨거운 기운이 얼굴에 닿으면 아이 뜨겁다하고 뒤로 까무러치기도 하고 아침엔 두어장있는 문제지를 풀고 엄마가 주는 볶음밥을 먹었다. 아빠는 아침부터 뒷동네 아이들이랑 놀지말라고 훈계한다. 학교 당겨오면 아빠가 물에 적셔 얼려놓은 행주를 꺼내놨다가 아무말 안하고 얼굴을 슥슥 닦아줬다. 그럼 콩국수 먹고 피아노를 치러갔다. 동네 애들이랑 놀고싶었는데 자꾸 못 놀게 하는 아빠가 미웠다. 재미도 없는 야구만 하루종일 보는 아빠가 미웠다. 몰래 뒤에 내려가서 환타 먹으면서 쓰레기장을 뒤지고 놀다가 팔뚝에 유리를 박고 돌아오곤 했는데 그럴때 난 하루종일 혼났다.
1학년때 언니 친구 남동생이 날 되게 미워했다. 아주 시커멓고 마른애였는데 나를 아주 죽도록 못살게 괴롭혔다. 걔는 2년후엔가 전학을 가버렸다. 나는 4학년때 다니던 피아노 학원에서 쫌 좋아하던 애가 있었다. 걘 하얀애였다. 내가 학원에 그렘린 인형을 가져간적이 있는데 그건 엄마가 갈기갈기 찢어서 버렸다. 그건 내가 지하철에서 주워온거였는데..
어릴적에 일어난 일들을 지금 생각해보면 너무 멀리 있고 정말 꿈만 같다. 그 땐 그때가 지옥같더니 이제는 지금이 지옥같다. 엄마는 광호도 모르게 죽어가는데 미리 말해주지도 않았다. 광호는 혼자 밥도 해먹고 동생도 돌봐야한다. 작고 통통한 손가락이 쌀을 퍼올리고 차가운 물도 만진다.
어릴땐 아주 작게 보였던 일들이 사실은 살아가는데 너무 짐스러운 일들이고 책임감이라곤 아무것도 몰랐던때에 내가 벌인 일들을 생각해보면 아주 우습기 짝이없다.
이제 지겨운 어른이 되었는데 아주 갑갑하고 숨막힌다. 나는 아직 덜 자랐는데 내 나이는 너무 무겁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