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때까지 내가 영화를 보던 수단은 토요 명화 극장과 일요일에 해주던 주말의 명화 그리고 낮시간에 해주던 세계 명화였다. 황비홍도 거기서 봤고 러시아 조직폭력배가 나오는 무서운 영화도 해리슨 포드가 나오는 모험 영화도 거기서 봤다. 영화라는건 당시 내게 돈 안드는 놀이 수단이자 현실에서 멀어질수있는 유일한 기회였다. 입학하자마자 지긋한 두통에 시달렸던 학교에선 클럽 활동의 일원으로 다양한 부를 만들어 회원을 모집하고 있었다. 생긴지 1년밖에 안 된 학교라 어설픈것 투성이었는데..그 중에서도 내 흥미를 끈 것은 한 달에 한 번 시내 극장에서 영화를 보는 영화 관람부. 명목상 회원 제한이 있을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생각 외로 이 써클은 인기가 가장 많아 가장 빠르게 품절된 부이기도 했다. 활동계획서를 작성하고 부모님의 동의를 구하고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처음 클럽 활동을 기다렸다.
쉬리는 그 해 2월에 개봉한 영화였는데 학교에 소문이 자자했다. 재미있다더라는 의뭉스러운 입소문을 넘어 엄청난게 나왔다고 했다. 당시 한석규는 흥행 톱스타였고 최민식은 TV 드라마로 송강호는 코미디 영화로 알려진 영화 배우였다. 교복을 입고 멀리 나간다는게 못내 창피하고 부끄러웠지만 영화를 본다는 두근거림과 떨림때문에 밤잠도 못 잘 정도로 나는 신나있었다. 함께 간 친구들도 모두 신난 눈치였다. 고작 이제 열 네살이 된 애들이 엄마 몰래 가 본 곳이라곤 어디가 있었겠는가? 오락실 정도밖에 없었다.
그 곳은 그야말로 어메~이징~ 쿵쾅대는 가슴이 곤두박질칠것만 같았다. 처음 가 본 먼 곳에, 신기한 코스튬을 입은 사람들. 많은 사람이 지나다니고 있는 지하철역, 대형 백화점. 그리고 두 손에 받아든 아무런 무늬가 없는 하얀 영화표 1장.
저마다 가져간 간식을 꺼내는 소리가 들렸다. 부산스럽게 화장실을 왔다갔다하는 친구들, 주의 주는 선생님들. 부스럭 소리와 음료수 캔위에 꽂혀진 빨대들. 불이 꺼지고 소란스러웠던 좌석들 위엔 눈망울을 동그랗게 굴리고 있는 아이들이 정면만 바라본채 입을 벌리고 있었다. 압도적인 크기와 고막을 터트릴것만 같은 생전 처음 들어보는 큰 소리. 그것이 내가 생전 처음 가 본 극장이었다. 삐걱거리는 팔걸이와 곰팡이가 슬어 퀴퀴한 냄새가 나는 의자. 앞,뒤 간격이라고는 눈꼽만큼이었지만 객석수는 놀랄 정도로 많고 스크린 크기도 상상보다 컸다. 이렇게 큰 화면이란게 세상에 존재하리라곤 전혀 해보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처음 롤러코스터를 탓을때보다 그 때가 더 떨렸다. 우린 어두컴컴한 공간에서 낯선 사람들에게 둘러쌓여 곁의 친구들에 의지해 오로지 앞만 바라봐야했고 어떤 화면이 나올지 몰랐기 때문이다.
영화가 시작했다. 소란스럽게 수다를 주고받던 친구들이 일제히 입을 다물었다. 14살이 보기에 생각보다 부담스러운 장면도 있었고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도 있었지만 또래보다 조숙(?)했던 난 일찍이 이 영화를 이해하고 있었다! 왜 여자 주인공이 슬픈 눈으로 남자 주인공을 바라봐야만 했는지, 남자 주인공 친구의 죽음이 왜 그리고 아팠는지! 배우들의 오물거리는 입술을 눈으로 보고 머리 뒷편에 달린 스피커에서 토해내는 커다란 목소리에 집중하고 귀를 기울이다보니 2시간동안 나는 명현씨가 되어있었다. 신나게 쏘고 사랑하고 달리다보니 영화는 끝났다. 두근거림을 안고 기다렸던 시간에 비하면 싱겁고 빠르게 지나갔지만 이 소중한 체험을 잊지 않기 위해 계속 장면들을 곱씹었다. 그곳을 나서면서도 친구들과의 웅성거림은 끝나지 않았다. 이런 장면에서는..그 장면에서는...그 배우가 했던 말은....
언제가 누구였는지 모르지만 진짜 영화는 영화관을 나서면서부터 시작한다고 말했었다. 내가 영화를 보면서 누군가와 함께 했는지 그 전에 무엇을 했는지 그 날의 날씨가 어땠는지에 이르기까지 사소한것들을 모두 꼼꼼히 기억해 두는 것은 그 날의 영화와 함께 했던 것들을 모두 잊어버리지 않고 추억으로 간직하기 위해서다. 난 아직도 그 날 내가 봤던 쉬리를 잊을수가 없다. 감독이 누구였는지 배우들이 누구였는지 기억하면서 엔딩 크레딧이 올라갈때 흐르던 마지막 음악도 모두 기억해두었다. 그리고 나는 마치 내가 그 영화를 본 것이 거짓말같은 일이었던것처럼 학교에서도 집에서도 계속 쉴새없이 그것에 대해 얘기했다. 다음 영화를 보는 날이 다가올때까지, 이런 장면에서는 어땠는지, 그 음악이 얼마나 슬펐는지...
이제는 세월도 많이 흐르고 영화를 대하는 마음도 사뭇 달라졌지만 아직도 영화를 보러가기전까지 내내 떨린다. 얼마나 재미있는 영화일까, 내가 좋아하는 배우가 얼마나 재미있는 연기를 했을까? 객석에 차분히 앉아 불이 꺼질때까지 두근거림은 멈추지 않는다. 영화가 끝나도 또 다른 영화가 시작된다. 이게 얼마나 재미있고 신나는 일인지! 아마 치아를 뽑을때 심장이 쿵쾅거리는것과 맞먹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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