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술과 내러티브..두 가지를 모두 가질 수 있을까? 하는 원초적인 질문에 대한 답변을 구하기 위해 몇 일간 보게되었던 구로사와 아키라 감독과 미후네 도시로의 마지막 작품인 <붉은수염>을 오랜만에 이야기해볼까한다..


나에게 구로사와 아키라는 신적인 존재다. 아니 그 이상일지도 모른다..그리고 미후네 도시로..라는 배우는 아직도 그를 대체할만한 배우가 없을 정도로 모든 면에서 넘사벽인 존재였다. 붉은 수염은...마음이 아픈 영화이기도 하고 매우 뿌듯한 작품이기도 하다..밑바닥(1957)의 정서를 관통하면서 주정뱅이 천사(1948)의 진리와 이키루(1952)의 교훈, 요짐보(1961)의 모습도 언뜻 보인다. 한마디로 붉은 수염은 50-60년대 일본영화의 황금기를 이끌었고 '구로사와 아키라'라는 글로벌 브랜드의 전성기를 갈무리하며 그의 영화인생 제 2막으로 넘어가기 이전, 일종의 유종의 미를 거두는 의미의 작품이며 실험적인 세대교체 형식의 작품이었다.




영화는 야마모토 슈고로의 소설 붉은수염 진료소를 토대로 시나리오화 되었다. (5년뒤에 개봉한 도데스카덴도 야마모토 슈고로의 소설 계절이 없는 거리를 원작으로 하고 있다.) 구로사와 감독님은 영화가 개봉하기전 이런 말을 남겼다.

"일본영화의 위기가 닥쳐오고 있지만 그것을 구하는것은 영화를 만드는 사람들의 열정과 정성말고는 없다. 나는, 이 '붉은 수염'이라는 작품안에 스탭 전원의 젖먹던 힘까지 쥐어짜내고 싶다. 그리하여 영화의 가능성을 한계점까지 쫓아보고싶다"

말속에 담겨있듯 구로사와 아키라는 본인이 살던 집까지 담보로 잡아 제작비를 마련했을 정도로 영화에 많은 것을 걸었다. 영화는 당시로서는 파격적이었던 2년 이상의 제작기간이 들었지만 고질라 시리즈 등의 개봉으로 정작 본 영화의 개봉은 연기에 연기를 거듭했다. 역주에 따르면 프로듀서를 맡았던 타나카 토모유키는 그 책임을 지고 사표를 세 번이나 썼다고...

여기까지가 알려진 사실로 이 작품에 구로사와 감독이 꽤 많은 공을 들였다는걸 알 수 있다. 제작사 토호와도 무리한 마찰이 있었고 결국 이 영화를 끝으로 계약을 해지했고 해외로 눈을 돌리기 시작한다. (토호와의 관계는 막장에 가까울 정도로 잔인했고 구로사와 감독은 세계적 인기를 끌었을때조차 국내 평단과 제작사측에서도 여유있는 도움을 단 한차례도 받지 못했다. 결국 마지막은 파국에 가까울 정도로 잔혹했고 지저분했다....)


미후네 도시로와의 마지막 작품이자 그의 마지막 흑백영화...

주인공은 가야마 유조가 맡은 야쓰모토로 쇼군의 주치의가 되는 것이 목표인 젊은 야망가..첫 오프닝씬의 롱테이크는 구로사와 아키라 감독의 영화에 주로 등장하는 인장으로 그의 영화의 백미가 되는 연출이기도 하다.

내러티브는 그리 어렵지 않다. 구로사와 아키라 감독 영화의 큰 장점이랄 수 있는 극명한 내러티브가 이 영화에서도 물론 통용된다.




미후네 도시로는 구로사와 감독에게도 특별한 존재이고 구로사와 감독 또한 미후네에겐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사람이기도 했다. 촬영스탭으로 지원한 곳에서 구로사와 감독의 눈에 띄어 배우로 데뷔했다는 그야말로 영화화같은 에피소드는 모두 알고있으리라 생각한다. 주정뱅이 천사에서 풋풋하면서도 강렬한 연기를 보여주었던 그 망나니가 마치 자신의 친구를 뒤이어 의사라도 된 듯..야생마같은 얼굴과 거침없는 말투..또렷하고 확고한 목표의식, 강직하면서도 지혜로운 안목까지..

미후네 도시로는 흑백영화임에도 불구하고 수염을 실제로 붉게 염색했다고한다..그만큼 캐릭터와 영화에 대한 이해도와 열정, 애정이 남달랐다. 영화는 야스모토가 시골에 있는 허름한 병원에 도착하는 것으로 시작한다. 사실 내러티브도 매우 심플하고 전개되는 과정도 지극히 통속적이지만 묘한 설득력을 가지고 있다. 붉은수염이라는 캐릭터는 마치 구로사와 감독의 분신처럼 초연한 자세로 극빈한 환자들을 가족처럼 돌보고 각자의 사연들을 보듬고 격려하고 치유한다. 몸의 상처뿐만이 아니라 마음의 상처까지도 고치려한다는 모리 선생의 말처럼 붉은수염은 초지일관 관조적인 시선으로 모두를 대한다. 바로 이것이 구로사와 감독이 관객들에게 전하고자 하는 진리일 것이다.



이 장면은 중반부에 사창가에서 오토요를 꺼내오려던 도중 불량배들과의 마찰씬이었는데, 마치 요짐보를 보듯 너무나 반가운 씬이었다. 영화 장르가 액션이 등장할만한 작품이 아니라 기대를 안했는데..잠깐이었지만 옛날 영화들 생각도 나고 너무 좋았다..




사찌를 연기했던 야마자키 츠토무. 훌륭한 연기를 했다.

사찌 캐릭터는 어쩌면 붉은수염과 함께 이 영화 전체를 아우르는 하나의 중요한 버팀목으로 존재한다. 난 교조적인 영화는 좋아하지 않지만 교훈적인 이야기는 좋아한다. 어떤 점이 다르냐하면...아마도 강압적이지 않은, 재료와 어우러져 스스로 맛을 내는 것이겠지.

사찌는 첫 등장부터 요양원 환자들에게 존경받고 사랑받는 캐릭터로 등장한다. 자신의 아픈 몸을 이끌고 병원에 있는 사람들을 위해 돈을 벌기 위해 죽어가는 몸을 돌보지 않고 일한다. 그는 병원에 환자로 들어오기 이전에 살던 곳에서도 그런 인생을 살았다. 왜 그랬을까? 그 이유는 후에 알려진다. 영화는 야스모토가 붉은 수염을 만나 스스로를 자만했던 시절을 지나 내적 성숙을 이루는 성장기를 그리면서 사찌와 오토요 등 부가적인 캐릭터를 등장시켜 옴니버스 스타일로 이야기를 전개시킨다. 그러는통에 영화는 3시간이 넘는 러닝타임을 갖게 되었지만 전혀 지루하다거나 또는 맥이 끊긴다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

사찌는 붉은수염만큼이나 중요한 캐릭터였는데 그의 과거 이야기를 통해 그가 왜 모든 이들에게 자신의 몸을 돌보지 아니하면서 베푸는가에 대한 설명한다. 이 과정에서 지리멸렬한 신파조로 이야기하기보다 응당 그럴 수 밖에 없었던 사정을 초현실적인 연출로 평범하지 않은 스토리로 만든다. 알다시피 구로사와 감독님은 20대 시절에 서양화가를 꿈꾸는 미술학도였는데 그 영향으로 그의 영화속 미쟝센은 동시대 일본 감독들에 비해 과도하게 튀고 대담하다.





내가 좋아하는 그의 연출

구도가 명확하고 대비도 뚜렷하다. 마치 그림을 그리는 것처럼 화면을 그려낸다는 느낌





이 부분도 아주 예술적인 연출이다.

응당 드라마에서 볼 수 없는 독특한 연출들이 많은데 이 점 또한 '구로사와'라는 브랜드에 걸맞는 가치를 제공한다. 내가 연출만 놓고 볼 때 가장 좋아하는 영화는 거미집의 성이다. (학문적으로 볼 때는 '꿈') 나는 그 영화를 오프닝씬부터 엔딩까지 한 장면도 빼놓지 않고 좋아한다. 그림을 그리는 사람이고 또 만화를 그리는 사람이라 흑백영화에 무한한 애정을 가지고 있는 것도 있지만 특별히 콘트라스트가 강하고 대비가 극명한 작품들을 좋아하는데 구로사와는 흑백안에서 마술을 부리는 천재였기때문에 그 애정이 더 각별하기도 하다.






오토요를 연기했던 니키 테루미, 49년 5월생으로 14살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발군의 연기력을 선보인다. 이 오토요라는 캐릭터는 도

스토예프스키의 (감독님이 사랑해 마지않는...그..) '학대받은 사람들'에서 발췌한 이야기를 토대로 붉은 수염 이야기에 포함시킨 설정이다. 마치 길고양이같은 눈빛을 하고 있던 오토요는 야쓰모토의 성장담에 꼭 필요한 캐릭터였다. 붉은수염과의 첫 수술을 기점으로 한차례 기절후 삶과 죽음 사이에서 의사로서의 역할에 대해 아무런 생각도 없던 야쓰모토는 흥미가 동하기 시작해 병원복을 입고 환자들을 진료하기 시작한다. 그 과정에서 사찌와 로쿠스케(화가 선생님)의 죽음은 야스모토의 내면을 한차례 성장시켰다고 볼 수 있다. 로쿠스케의 진찰과 죽음을 지켜보는 것을 처음으로 담당했던 순간 그는 자신 안에서 무언가가 변하고 있음을 느꼈고 로쿠스케의 딸에게 붉은수염이 베푸는 친절을 통해 의사란 무엇인가?에 대한 근본적인 물음이 시작되었을 것이다. 그리고 자신의 죽음은 아랑곳하지 않았던 사찌가 죽음의 문턱에서 모두들에게 털어놓았던 이야기와 죽음앞에서 초연해졌던 그를 눈 앞에서 목격한 야스모토는 드디어 삶과 죽음 사이에서 의사의 역할과 병을 진료하는데 있어서 의사의 열정과 진정성은 그 어떤 것으로도 훼손되어져서는 안된다는 것을 깨닫는다.

그리고 그에게 한차례 붉은수염이라는 의사에 대한 강한 존경심을 느끼게 되는 사건이 바로 '오토요'라는 캐릭터를 만나면서 벌어진다. 앞서 초연한 자세로 일관했던 붉은수염을 단지 독특하고 강직한 의사 정도로만 느꼈던 야스모토는 오토요를 돌보고 또 오토요에게 돌봄을 당함으로서 의사가 환자를 치료함에 있어서 일방적인 관계만으로는 마음의 병까지 고칠 수 없음을 깨닫고 그것을 깨닫게 해주기위해 이런 방법을 고안해낸 붉은수염에 대해 '명의'라는 확고한 생각을 갖게된다.

또한 오토요라는 캐릭터 자체도 이후에 나온 병원물에서 클리셰로 쓰이게 되는 성격을 가지게 되는데, 스스로 마음의 문을 닫고 아무것도 믿지 않던 소녀가 끈질긴 사랑과 믿음을 통해 마음의 문을 열고 사람들과 소통하고 서로를 믿고 의지하며 성장하게 된다. 오토요가 야쓰모토에게 정을 느끼는 과정이 너무 귀여울 정도로 니키 테루미가 연기를 너무 잘했다..





이 부분은 아주 인상깊은 연출이고 꼭 나중에 감독님께 오마주하고싶은 연출이기도 한데..(마음같아선 졸업작품으로 바치고싶은데...할 수 있을지...는...) 붉은 수염이 사창가에서 오토요가 열이 많은 상태인 것을 알고 데려가려고 하는 씬에서 그녀를 비출때 이런식으로 연출했고 뒤에 야스모토의 첫 환자로 코이시가와에 거주하게 되면서도 줄곧 이런식으로 연출된다. 그녀의 눈만 밝게 비추는데 후반부로 갈수록 병이 나아가는 과정에서 소녀의 얼굴을 전부 비추게 된다. 오토요의 마음의 문이 열려가고 있는 과정을 그녀의 얼굴에 비추는 빛과 클로즈업을 통해 은유적으로 묘사했다.




초보라는 극빈가정의 아이가 단체로 쥐약을 먹고 실려왔을때 병원의 간호사들과 오토요가 우물속으로 초보의 이름을 울부짖는 장면. 토속적인 부분이라서 정말 좋았다. 이 부분만 몇 번을 울면서 봤는지...

1960년대 일본은 고도경제성장을 이루는 과정에서 올림픽 개최, 경제호황 등 들뜬 분위기였지만 그에 따른 많은 폐단도 있었다. 어쩌면 고리타분한 이야기일지도 모른다. 60년대 후반에 에도시대의 이야기를 하는 것은..하지만 70년대에 접어들어 일본은 영화도 내리막길을 걸었고 버블이 시작되게 된다.



마지막은 스승과 제자의 모습을 비춰주면 끝난다.

구로사와 감독님이 하고싶었던 이야기는 무엇이었을까?

한국전쟁이 끝나고 경제특수를 맞은 일본을 바라보면서 그는 젊은이들에게 어떤 이야기를 하고싶었던걸까? 전통을 계승하면서 신세대의 방식으로 올곧은 믿음과 진리를 지키려는 마음으로 당당하게 앞을 바라보며 소중한 가치를 지켜가는 것.

우리가 살면서 물질 속에 잃어버릴 수도 있는 그 소중한 가치를 지켜달라고 이야기하는것만 같았다. 3시간이 넘는 시간동안 야스모토와 나를 동일시하면서 보다보니 그냥 눈가가 촉촉해질때도 있고 만면에 미소를 품을때도 있었다.
구로사와 아키라 감독님은 호랑이 꼬리를 밟은 사나이로 데뷔해 활극을 그리면서도 드라마를 그리면서도 거대한 작품 안에 '인간'이라는 소박한 진리를 항상 함께 이야기했다. 믿음과 배신, 거짓말과 사실에 대한 이야기 안에서도 언제나 인간의 소통을 그렸던 그의 마지막 흑백영화에서 당신은 초연하고 관조적으로 다시 한 번 진리에 대해 낮은 어조로 이야기했다.




가운데 시무라 타카시상ㅠㅠㅠㅠㅠㅠ

구로사와 아키라 감독님의 작품 전체를 포괄적으로 아우르는 배우 미후네 도시로와 시무라 타카시. 그의 시작도 그러했고 마지막도 그러하리라.

시무라 타카시 배우님은 아주 잠깐 등장하지만 영화에서 관객에게 중요한 질문을 던지는 역할을 했다.




스기무라 하루코상ㅠㅠ

나루세 미키오, 오즈 야스지로...50-60년대 거장들의 영화에 잇따라 출연 대담하고 노련한 연기를 펼쳤던  연기파 배우. 오토요가 있었던 사창가의 여주인으로 잠시 등장해 인상적인 연기를 보여주었는데 어찌나 반갑던지..

후반부에 건강해진 오토요를 다시 찾으러 갔을때 병원의 간호사들이 스기무라상한테 무로 다구리(;;)를 하는 장면이 있는데 이 장면에서 스기무라 하루코상이 대선배라는 점 때문에 배우들이 너무 긴장을 한 탓에 ng를 너무 많이 내는 바람에 촬영을 위해 준비했던 무가 전부 못쓰게 되었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오른쪽 타나카 키누요



왼쪽 류 치슈


구로사와 아키라 감독의 선배이자 일본영화계의 거장이자 아버지였던 오즈 야스지로 감독, 미조구치 겐지 감독의 페르소나이자 오르페우스였던 타나카 키누요와 류 치슈를 각각 어머니와 아버지로 등장시켜 50-60년대 전성기를 이끌었던 일본영화계의 세대교체를 알림과 동시에 거장들에게 구로사와 감독 스스로 존경을 표했다.




토호와의 기나긴 기싸움, 일본언론의 차가운 대우 등..일본영화의 천황이라는 칭호에 어울리지 않게 홀대받았던 구로사와 감독의 마지막 흑백영화, 그리고 토호와의 이별작품이자...미후네 도시로와의 마지막 콜라보...참 여러모로 뜻깊은 작품이고, 마음이 훈훈해지는 작품이다. 이키루에 이어 다시 한 번 따듯한 작품을 했는데 이 작품 이후로 실험적인 영화들을 주로 찍었고..사후에 아키라 감독에게 헌정되 비그치다가 이 영화를 계승하고 있는 느낌이 들기도 한다.

존경하는 분이고 나에게 있어 너무나 소중한 삶의 진리를 알려준 고마운 분이기도 하다. 생전에 한 번이라도 만났다면...얼마나 좋았을까 몇 번이고 생각할 정도로 가슴벅차게 만들어주는 분..그의 영화 속에 없는건 우리에게 필요없는 것들 뿐이다. 그는 소중한 것만을 담았다. 그리고 보여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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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술적인 분석은 받아들이지 않겠다..이성으로 보는 영화가 아님을 미리 당부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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