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전에 아키 카우리스마키의 이야기가 나와서 오랜만에 내가 아키의 영화중 가장 좋아하는 영화인 성냥공장 소녀를 다시 꺼내 보게 되었다. 여전히 짙은 회색빛과 ,탁한 녹색이 감도는 이 영화는 핀란드의 거장 아키 카우리스마키의 1989년작이다. 아키 카우리스마키라는 사람은 몇 년 전 과거가 없는 남자라는 영화가 개봉했을때 알게되었고 당시 내가 핀란드에 대해 알고있는거라곤 교육이 꽤 성공적이고 춥고 해가 많이 뜨지 않으며 자살율이 높은 나라라는 것 정도였다. (그리고 전세계 유일무이 헤비메탈이 차트 1등 먹는 나라..)

주인공은 공단로 44번지에 사는 못생긴(나한텐 익숙해서 그런가 너무 사랑스럽다.) 소녀 이리스다. 부모님은 이혼을 해서 현재 친엄마와 계부와 함께 세가족이 살고 있으며 성냥공장에서 일해서 번 돈으로 가족을 부양하고 산다.




오렌지 쥬스 다섯 병을 마시는 동안 아무도 그녀에게 말을 걸지 않는다.

영화를 보고나면 일순 마음이 답답해져온다. 그것을 사회적 부조리의 고통이라고 해야할지..삭막하고 차가운 가족의 단절된 소통문제때문이라고 해야할지..빌어먹을 계급과 남녀위계질서 또는 외모지상주의의 폐해때문이라고 해야할지 막막해진다.

왜냐면 이 모든게 이 짧은 영화안에 모두 담겨있기 때문이다.



푹 패인눈과 창백하고 푸석푸석한 얼굴의 이리스는 고독한 소녀다. 그 아무 표정없이 차갑고 창백한 얼굴 위로 일말의 감정표현없이 다림질을 하고 상을 차리고 설거지를 한다. 성냥공장에서 하루종일 서서 일하다 오는 그녀임에도 불구하고 묵묵히 아무런 불평없이 가족들을 위해(심지어 이 가족은 서로 애정조차 없어보인다.) 집안일을 해야한다. 굳게 다문 입술과 영혼없는 눈동자로 또한 아무런 감정이 없어보이는 계부와 끊임없이 피워대는 줄담배 사이로 돈을 토해내라며 이리스의 목구멍을 메마르게 하는 가족은 그녀에게 아무런 도움이 되질 않는다.

공장에 가는 버스에서 읽는 할리퀸 로맨스 소설이나 사교댄스장도 그녀에게 별반 도움이 되지 않는다. 그녀의 외로움을 더욱더 배가시킬 뿐이다.

그 때 천사의 속삭임처럼 다림질을 하는 이리스의 귓속으로 들려오는 중국의 천안문사태 관련 뉴스가 그녀의 감각을 깨우기라도 한 듯 공장에서 일해서 받은 월급으로 자신을 위한 드레스를 한 벌 사입지만 돌아오는건 독사같은 눈빛으로 뺨을 때리는 부모의 얼굴이다. 그녀의 고충이나 딸의 기분같은건 애시당초 관심주제도 안된다는듯이 테이블 위에 올라오는 음식과 텔레비젼에서 떠들어대는 소리, 신문에 박힌 글자, 딸의 손에서 나오는 월급에만 관심있는 친모와 계부.




생일날 혼자 먹는 케잌의 맛을 아십니까?




영화의 중반부를 넘어서면 왠지 모를 갈증에 시달린다. 기계에서 만들어져 나오는 성냥의 검품 작업을 하는 이리스의 주변에서 들리는 소리는 시끄러운 마찰음, 사교댄스장에서 들려오는 음악소리도 그녀의 고독함을 완전히 해방시킬 수 없다. 그런 시끄러움 소음들 속에서 빠져나와 안식처인 집안으로 가도 오히려 마음껏 자신의 소리를 내기는 커녕, 집안일을 마치면 쥐죽은듯이 이불 속으로 들어가 잠을 청해야한다. 그녀에게 소리를 낼 수 있는 공간은 아무곳도 없는 것이다. 그런 그녀가 유일하게 용기를 낸 것은 생일날. 혼자만의 케잌과 영화를 본 후, 전날에 만난 남자를 찾아가 나를 보고싶어할거라고 생각해서 왔다는 말을 토하듯이 뱉는다.

그녀의 얼굴은 종반에 치닫을수록 더 퀭하고 푸석푸석해진다.

우리는 무성영화 시대에 대사가 없는 영화들을 보고도 충분히 울고 웃을 수 있었다. 아키 카우리스마키의 영화들은 무성영화의 미덕을 그대로 컬러영화에 담아 대사를 최대한으로 줄이고 인서트컷과 인물이 담겨있는 인서트로 나눈다. 인물들은 눈과 손짓으로 연기할 수 있고 우리는 그들의 표정과 행동이 주는 의미를 최대한 흡수하고자 좀 더 마음껏 화면 구석구석을 향해 귀를 기울이게 된다. 영화에서 우리는 등장인물들의 대사보다 쥬크박스에서 흘러나오는 노래의 구닥다리 가사를 더 많이 듣게 되는데 이것이 어쩌면 감독의 언어를 대신하고 있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영화에서 내가 가장 좋아하는 장면이다.

계부가 들고 온 오렌지를 칼로 깍아먹는다. 자신을 따듯하게 감싸주지 않는 엄마에 대한 미움도, 자신의 아이를 지우라고 말하는 사랑했던 남자의 모진 말의 아픔도, 계부의 애정이라곤 1그램도 들어가있지 않은 말투도..때로는 감정과잉으로 최루성 신파에 가까운..가히 성모마리아의 수난에 가까운 전투적인 영화를 만들어내는 감독들도 있지만 아키의 영화세계는 그것에 비하면 담백하다 못해 기본적인 소금간도 치지 않은 요리에 가깝다. 상황은 소녀를 비극에 빠트리고 풍경과 얼굴을 통해 그녀의 세계가 곧 무너질 것이라는걸 암시한다. 하지만 우리에겐 눈물이 허용되지 않는다. 그녀의 두 뺨에 흐르는 눈물을 닦아주고싶지만 그럴 수도 없다.

대사를 풍부하게 넣어 굳이 상황을 통한 연출이 없어도 내용을 모두에게 알아듣도록 몇 번이고 설명하지도 않고 그럴듯한 우연과 필연들을 집어넣어 상황의 부조리함을 과대포장하지도 않는다. 망설임없이 있는그대로를 보여주고 거짓된 눈물로 호소하지 않는다. 차갑고 메말랐지만 그 어떤 말보다도 가슴에 빨리 와닿는 것이 그의 영화다.

이리스의 쥐약이 모두를 죽이고나면 이 무거운 마음도 가라앉고 상처도 말끔이 나을 것이란 기대는 버리는게 좋다. 이리스의 마음이 전염되어 그들에게 욕을 퍼붓고싶어지고 보내준 수표를 그의 얼굴앞에 갈기갈기 찢어 보란듯이 웃어주고싶다. 그러나 이미 이리스는 눈 앞에서 사라진지 오래고 영화는 검은 화면 위에 감독의 이름을 띄우고 있다.


좋은 영화들은 많지만 행동하고싶어지게 만드는 영화는 적다. 프로파간다로서의 목적을 가지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될 경우는 더욱더 희소하다. 나는 지아 장커나 아키 카우리스마키의 영화들을 보면 그런 기분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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