뒤늦게 베스트 오퍼를 보았습니다.

일본에서는 '감정사와 얼굴없는 의뢰인'이라는 이름으로 개봉을 했는데, 처음에는 그 영화인줄 몰랐음. 부산에서 한걸로 알고 있는데 그게 맞나? 긴가민가 하면서 봤는데 맞다 맞어 그 영화였어. 매우 보고싶었던 영화였는데 보고나니 여운이 꽤 길더라고요. 쥬세페 토르나토레 감독과 엔니오 모리꼬네옹은 언제나 아름다운 조합이네요.





밥먹을때조차 장갑을 벗지 않고 타인의 전화기를 빌릴때도 깨끗이 닦는 것을 잊지 않는 어마어마한 결벽증을 갖고 있는 무결점 완벽주의자 버질 올드만. 쳐다보는 것만으로도 식은땀까지 흘리게 만드는 무서운 노년의 남자..자신의 일에 완벽을 기하고, 평범한 친구라고는 시계 수리공인 로버트가 전부. 완벽한 것처럼 보이는 그에게도 약점은 있었으니..그것은 바로 인간관계..그것도 여자와의 관계.

처음에는 왜 이렇게 빈약한 시나리오를 그대로 진행했을까? 하는 의문이 들었다.  여태까지 쥬세페 감독님이 만든 영화들, 시네마 천국이나 말레나. 특히나 피아니스트의 전설을 보면 구조도 감정선도 복잡하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한 번에 설명되는 것이 없었다. 한마디로 그의 영화는 그다지 친절하지 못했다. 은유와 상징들이 널려있고 말레나와 같은 경우는 소년의 성장영화쯤 되나보다 하는 가벼운 시선을 걷어내면 그 안에 존재하는 무수한 폭력과 잔인함이 매우 생경하게 다가온다. 시네마천국도 마냥 감동적인 영화만은 아니고 피아니스트의 전설은 순수하다못해 광기가 느껴지는 천재의 이야기였다. 그리고 그 천재는 많은 상징적인 것들과 계속 대화하고 끊임없이 도전받아야했다. 쥬세페 토르나토레 감독님의 영화는 그다지 친절하지 않았다. 직설적이지 못했고 적당한 시선 너머의 감정들을 캐치하지 못하면 감독님의 이야기를 전달받기가 어려웠다. 그런데 전작인 언노운 우먼때도 얼핏 느꼈던 단순해진 스토리라인과 감정과잉이 베스트 오퍼에서는 감정이 절제되어있는 대신에 스토리는 더 단순해졌다. 왜 이랬을까? 곰곰이 영화속 인물인 버질을 탐구해보았다.

이제 곧 영감님 소릴 듣기 직전인 노년의 한 남자. 집도 없고 개인 호텔에 수백 켤레의 장갑을 매일 바꿔서 끼고, 일 외에 사적인 생활이라고는 경매에서 친구를 통해 비밀스럽게 낙찰받는 여성들의 초상화를 프라이빗룸에 보관하는 것..사회적으로 성공했고 빈틈없어 보이는 완벽한 그의 인생에 새롭고 작은 변화를 집어넣고 그가 지켜온 것들을 무너트리고 그 안에 여태껏 느껴보지 못한 새로운 형태의 감정들을 끼워넣는다. 미술품 감정사인 주인공의 직업 설정은 너무나도 완벽한 초이스라 그저 감탄할 수 밖에.




버질에게 걸려온 의문의 전화. 묘령의 여인..

스토리라인이 워낙 간단하기때문에 중반부에서 클레어가 편집장이라는 사람에게 전화하는걸 버질이 엿들을때 이미 대다수의 관객은 영화의 반전이나 결말을 예상했을지도 모른다. 나조차도 그 전화통화의 내용을 듣고 이 여자가 통수치겠구나..싶었는데, 중요한건 감독이 굳이 미스테리 장르를 빌려서 이런 설정들을 꿰어맞춰놓은건 반전이 가져오는 쾌감을 주기 위한 것이 아닌 버질을 통해 변화하는 인간의 세밀한 감정을 보다 극단적이고 효과적으로 나타내기 위함이라는 것을 알았다.

버질은 나이가 많은 노인이지만 평생 독신이었다. 여자뿐만 아니라 다른 많은 사람과의 개인적인 관계마저도 끊고 살아왔던 한마디로 인간관계에서만큼은 신생아와 다를 것 없는 서투른 사람이다. 그에게 클레어라는 미지의 존재에게 품게 되는 사랑이라는 감정은 감히 값이나 가치를 매길 수 없는 종류의 것이라는걸 그는 깨달아나간다. 난생 처음 느껴보는 새로운 감정. 사기를 당했다는걸 알고나서조차 시계로 가득찬 카페에서 그녀를 하염없이 기다리는 그의 모습에서는 사랑에 배신당한 사람이 아닌, 사랑하는 여인을 기다리는 남자의 고집스러움이 보인다.

제프리 러쉬의 절제된 연기에서는 장인의 모습이 겹쳐보일 정도로 노련하고 원숙하다. 누군가가 그의 연기를 감정한다며 트리플 에이 정도는 나오지 않을까싶을 정도로 멋진 연기를 뽐낸다.




수백 점의 초상화에 둘러쌓여 살아왔던 그에게 클레어라는 존재는 다루기 어렵고 까탈스러운 미지의 존재이지만 비싼 값을 치루고라도 꼭 선점하고싶은 한 점의 작품은 아니었을까? 로버트의 조언에 따라 화장품을 선물하고, 고가의 아름다운 드레스와 와인을 선물하는 버질의 모습은 사랑에 빠진 소년처럼 무모하고 도전적이며 감정적으로 컨트롤이 안되고 때로는 우습고 때로는 시적이다. 그녀는 소위 히키코모리. 광장공포증을 가진 여자로 15살 이후 외출한 적이 없는 '설정'의 여자. 이 영화를 두 번 보면 재미있는게 처음에는 그런 설정 위에서 두 사람을 보는 관점이 다르고 두 번째에는 이미 그녀가 버질을 속이고있는 상태라는걸 알고보면 또 다르다. 그래서 엔딩의 의미가 여러번 보면 좀 다른게 가슴에 와닿는다. 제프리 러쉬는 연극배우 출신이고 주로 거장들과 특히 시대극을 배경으로 한 영화에서 많은 역할을 맡은 탓에 근엄하고 아카데믹한 연기를 주로 한다는 인상이 강한데 영화에서 철저하게 멘탈이 붕괴되어가는 후반부의 모습은 많은 연기자들이 배워야할 덕목이 아닌가싶다.

시나리오를 일부러 빈틈이 많고 간단하게 쓴 것도 이 제프리 러쉬라는 배우때문이 아닌가 싶었을 정도로 그는 많은 빈틈과 공백들을 본인의 연기로 전부 메꿔버린다. 여인에게 사랑에 빠지는 모습도 어떻게 보면 억지스럽고 로버트의 설정이나 개연성도 많은 부분 설득력의 근거가 부족한데 그 많은 빈틈과 감정의 공백들은 표정으로, 손짓으로 메꿔버리는 제프리 러쉬의 연기를 보고 있으면 작은 탄성이 그리고 그에 대한 경외심이 마음 속에서 꿈틀거린다. 그녀와의 씬들은 생각보다 꽤 낭만적으로 꾸며져있다..첫키스씬도 그렇고 보이지 않는 공간으로 숨어버린 그녀를 찾아헤매는 버질의 모습도 그렇고..스릴러라는 1차적 포장을 벗겨내면 꽤나 순수하고 예쁜 로맨스가 있다. 물론 그것은 가짜였지만.




반전은 영화에서 그리 중요하지 않다. 그렇기 때문에 중간에 전화씬이 있었던거고..난 개인적으로 뿌린 떡밥을 전부 거두는 시나리오를 좋아하는데 클레어의 집 근처 카페에서 난쟁이 여인이 숫자를 세는 의미와 클레어네 집에서 발견한 시계 태엽들이 말하고 움직이는 인형이 되어 마지막으로 그에게 전달되는 것, 그리고 바질의 친구였던 빌리가 마지막으로 보내는 그림 연출은 매우 좋았다. 의미에 집착한다기보다 의미가 있는 것들이 모여 프레임의 한 부분을 담당하는 것을 매우 좋아하기 때문이다. 그것들은 얼핏 작은 부분이기때문에 눈에 다가오지 않을지 몰라도 전체적인 그림을 볼 때 중요한 요소에 해당하기도 한다.

여인의 숫자는 그녀의 거짓말을 상징하고 태엽들이 모여 완성된 인형은 관계의 종말을, 빌리의 마지막 선물은 높은 가치에 해당되었던 버질의 미술품 감정들이 사실은 무의미하고 존재하지 않는 집착이 아니었던가 하는 의문을 품게 만든다.



(이 사진에서 제프리 영감님이 너무 좋아서 그냥 올려봄)



쥬세페 토르나토레 감독님은 곧 있으면 환갑이다. 마틴 스콜세지(71) 감독이나 우디 앨런 (78) 감독에 비하면 아주 젊은 나이고, 왕성하게 작품 활동을 해도 모자랄 나이다. 이탈리아에서도 그렇고 미국에서도 그렇고 베스트 오퍼 공개 이후 그간의 쥬세페 영화들과는 조금 다르다는 평가가 많았는데 그도 그럴것이 이 영화의 장르는 스릴러고 여지껏 쥬세페 감독님이 시도하지 않았던 장르물이기 때문이다. 물론 나도 매우 흥미로웠다..언노운 우먼에서 변화의 조짐을 보였던 그가 좀 더 달라졌으니말이다..그의 이런 도전들을 기꺼이 환영한다. 그는 아직 젊으니까.

많은 거장들이 나이를 들면서 더욱 더 심플해지고 메세지는 간결해진다. 그리고 연출은 더욱더 고집스러워지는데, 우디 앨런의 블루 재스민도 그러했고 마틴 스콜세지의 더 울프 오브 월 스트리트도 그러했다. 달라지고 있는 영화계나 주변의 변화와는 상관없이 그들은 고집스럽게 자신들의 연출을 밀어붙인다. 베스트 오퍼의 그 고고한 자태도 박수갈채를 보내고싶을 정도로 우아하고 도도했다. 던져도 부서질것 같지도 않고 색을 덧칠한다고 해서 그 가치가 훼손될것 같지도 않던 그 연출에 장인의 뚝심이 느껴졌으니까...

그의 의도는 성공했다고 생각한다. 스릴러라는 장르적 특성보다 한 남자가 새로 느끼고 체험하는 감정에 대한 나름 로맨틱했던 설명들과 낭만적이면서도 처절한 감정만 가지고 밀어붙인 후반부만으로도 그의 의도는 충분히 성공적이었다. 그의 영화속에서는 언제나 예술가들이 존재했고 그것들은 미학적으로 어떤 경지에 올라있었고 그들은 예술과 삶의 연결고리들을 언어와 행동으로 표현했다. 우리는 그 너머의 영역에 존재하는 설명되지 못하는 언어들을 음악으로 영상으로 느낄 수 있었는데 베스트 오퍼에서는 그게 한층 더 간결하고 직접적으로 표현되었다. 그것은 진짜 사랑이었을까? 에 대한 의문보다..과연 사랑이라는 무형의 예술은 미학적으로 감정 가능한 가치일까? 라는 의문이 더 마음속에 남았다. 시계가 가득한 카페에서 동행을 기다리는 그의 텅 빈 눈동자가 아주 긴 여운으로 남을 것 같다.


브라보 마에스트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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