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작년에 외할머니가 돌아가셨을때가 11월이었다.
추운건지 시원한건지 애매모호했던 계절감에 며칠 휴가를 내고 내려가서 입관하고 땅을 파서 묻고 땅밟기도 하고 떠나보내며 마지막 노래도 부르고 그런 기억이 난다.
외할아버지 돌아가실때는 너무 어릴때였고 부모님이 언니랑 나는 서울에 두고 내려가셔서 그 때는 내가 기억하고 있는, 내 추억속에 분명히 존재하는 사람을 떠나보낸다는게 무엇인지 전혀 몰랐고 사람이 죽는다는것. 땅으로 돌아간다는 것에 대한 의미를 알게되었을때는 외할아버지에 대한 기억이 너무 희미하게 남아있어서 그게 그리움이란 감정으로 번지는데는 꽤 시간이 걸렸던 것 같다. 딱히 사람이 그립다기보다는 어릴때 받았던 사랑이 형태가 없는 냄새처럼 피어오르다가 금새 ​사라진다는 생각이 들었다.
외할머니랑은 추억이 제법 많고 기억하고 있는 것들도 많아서 정말 이제 내가 보러가면 볼 수 있었던 사람이 세상에 더는 존재하지 않는구나 라는 생각이 들었는데 그게 가장 현실적으로 다가왔던게 할머니가 수의를 입고 누워있는걸 봤을때였다. 희귀질병을 앓고계셔서 근육이 점점 퇴행하고 굳어져 허리가 90도로 휘어졌었는데 거의 마지막에는 움직이는것조차 힘들 정도로 고통스러워하셨는데 죽고나니 그제야 비로소 그 허리를 곧게 필 수 있다는게 너무 서러워서 울컥했다. 산다라는것이 계속 고통이라면 죽음이 나를 해방시켜줄 수 있을까?
끔찍한 생이라도 몇번을 다시 살게해준다면 그것을 선택할 수 밖에 없을 정도로 삶은 매혹적이다. 살아있어서 느낄 수 있는 것들 중에 고통과 불안마저도 이 삶에 너무나도 아름다운 긴장이 되어주는 것이다. 우리가 가족으로 만나고 친구와 동료 연인으로 만난 것은 본디 슬픔과 기쁨과 고통의 굴레를 수없이 돌고 돌아 인연이 된 것일거다. 그렇지 않다면야 이 친근하고도 질긴 인연은 설명이 되지 않는다.
나는 외할머니의 죽음을 계기로 내 삶과 죽음이 아주 근접하게 맞닿아있다는것을 깨닫게 되었고 내 가까운 사람의 영면을 통해 그 인연이 너무나도 행복한 풍경속에 시들지 않는 꽃처럼 길게 지속되리라는것도 알게 되었다.
우리 촌에서눈 장례를 치룰때 관을 땅에 묻고 흙을 뿌리고 땅을 발로 밟아 모양을 만들고 노래를 부른다.
행위에 이유가 있고 사연이 있다.
요즘에 내 또래나 어린 친구들을 보면 불안과 우울에 빠져 누군가를 미워하고 분노를 공격으로 표출하는 일이 많은 것 같다. 좋은 어른, 훌륭한 어른이 조금 더 나은길로 인도하지 않아서일까 아니면 지금의 이 세상이 좀 더 좋은 세상으로 진화하기 위해서 그 수많은 분노와 혐오가 광장으로 떠내려오고 있는 것일까
아무도 너의 얘기를 들어주지 않아서일까
아무도 너를 안아주지 않아서일까
너는 분명히 괜찮은 사람이고 우리 잘하고 있는데 아무도 너를 신경써주지 않아서일까
익숙하지 않아서 처음이라서 잘 몰라서
그래서 서툴고 긴장한 것 뿐인데 사회는 개인의 상처를 하나하나 돌보기엔 너무 바쁘고 한 번의 실수를 용납하기엔 너무 빠르게 지나가버린다.
괜찮다 실수는 누구나 하는거고 세상은 누구나 처음이지
우리는 처음인 것 치고는 제법 잘 살아가고있지
그리고 조금은 괜찮은 사람인 것 같아
사랑을 나눌 수 없다면 적어도 자신은 혐오하지말자
얘기하고싶겠지 나는 이런 사정이 있다고
들어줬으면좋겠지 나는 이런 사람이라고
그러니 나를 오해하지마세요 사실 저는 괜찮은 사람입니다

외할머니를 묻은 그 무덤 위 흙을 밟던 날이 문득 문득 떠오른다.
세상에서는 잊혀진 존재이지만 우리 가족에게는 괜찮은 사람이었던 할머니. 만나서 반가웠고 우리 또 다시 만났으면 좋겠어.

편안해졌으면
그리고 네 얘기는 내가 들어줄게

안녕 우리 또 만나는거야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