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수는 나의 것, 영화를 본지도 오래된 것 같고 신하균 젊었을때 찍었던 영화 중에 내가 제일 좋아하는 작품이라 큰 스크린으로 보구싶어서 오늘 무리해서 보고 왔다. 사실 영화가 너무 심플해서 더 이야기를 붙일 것도 없다고 생각했지만 오래 전에 봤을때랑 느낌이 사뭇 다르다는걸 느꼈다.

몇 년 전에 봤을땐 너무 단순했다. 누나의 수술을 위한 돈이 필요해서 돈만 받고 아이는 돌려줄 '착한'유괴를 결심한 프롤레타리아 청년 한 명과 사실상 세상에서 필요로하는건 누나와 여자친구뿐인 너무 단순한 세계를 가진 청년 한 명이 이 영화의 주요인물이다. 단순히 유괴가 잘못 되어 실수로 아이가 죽었고 그 사실을 알게 된 아이의 아버지가 유괴한 남자를 살해한다. 그리고 그 남자도 누군가에 의해 살해당한다. 사필귀정의 완벽한 결말이라고 생각했는데 여기에 아나키스트와 공장노동자의 가족이 전원 자살하는 것으로 인해 약간의 복합적인 감정이 생기게 되었다. 사실 상투적인 부분을 골라내라면 너무 많아서 오히려 영화가 전체적으로 그렇다라고 말할수도 있을 것 같다. 소리를 듣지 못하는 류와 아픈 누나, 그리고 그런 아무것도 없다 못해 마이너스인 남자를 사랑하는 아나키스트 영미라는 설정 자체도 너무 스트레오타입이 아닌가

아이가 부검당하는 모습을 바로보지 못하지만 류의 누나의 배가 갈리는 모습은 태연하게 하품까지 해가면서 지켜본다. 영화는 처음부터 모든 우연이 비극적인 결말을 유도하듯 드라이하게 흘러간다. 그리고 그런 흐름을 반증하듯 아픔에 신음하는 누나의 앞에는 소리를 듣지 못하는 동생이 음식을 섭취하고 있고 옆방의 네 마리의 짐승은 자기위로에 한창이다. 누군가에게 시작된 사소한 비극이 지극히 평범한 사람들의 일상을 뒤흔들고 미래를 바꾸어놓게된다. 자꾸 일이 안좋게 풀려간다. 퇴직을 당하게 되고 장기기증 사기를 당하게되고 결국 벼랑끝에 류를 몰아놓고 선한 의도따위 비웃는 것 같다. 착한 주인공은 없고 세상은 너무 냉혹하고 결국엔 피해자라고만 생각되던 사람도 결국엔 누군가에겐 가해를 한 사람이고..박찬욱 감독의 초기작이라 그런지 씬과 씬 사이의 연결들이 무자르듯 단호해서 너무 뜬금없는 것이 아닌가싶은 부분도 많다. 그래서 그런지 어느 주인공 하나를 붙들고 감정을 밀어넣기도 힘들지만 오히려 그게 하드보일드라는 장르에는 제격인거 아닌가하는 생각도 들 정도로 어느 하나, 누구에게도 동정심을 불어넣지 않는다.

모든 사람은 생명력을 잃은 물체들같고 영미의 죽음 이후에 서로의 집에서 서로를 기다리는 두 사람은 이제 복수의 의미조차 명확하지 않은, 삶에 지쳐버린 떠돌이 개가 되어버린 것처럼 보인다.

박찬욱의 다른 작품들에 비해 설익은 티가 많이 난다. 무정부주의 단체의 유일한 회원이라고 했지만 그녀의 유언대로 단체 조직원은 동진을 살해한다. 돌아가며 칼로 찌르는 의식을 치르고 사형선고 종이를 가슴에 붙인다. 영미라는 아나키스트는 이 유괴에 정당성을 부여해주기 위해 나타난 개념으로 보인다. 누나의 죽음은 아이를 죽게하고 아이의 죽음은 영미를 죽이고 영미의 죽음은 류와 동진이 서로를 증오하게끔 만든다. 그리고 테러단체의 등장은 이 영화를 상식밖으로 끌고 나가는데 한 몫 한다.

영화가 진행되면서도 나름 착하게 살았다고 항변하는 동진의 무표정한 얼굴과 용접공 가족의 죽음이 대치 되어 점점 아리송한 상태가 되어간다. 동진의 사적복수를 응원해야하는 것인가. 아니면 저 사람도 다른 가정을 무너트린 사람이니 본인의 죗값을 치르는 중이라고 비아냥거려야하는걸까. 어쩌면 이 모든 아이러니를- 인간은 생각한대로 살아지지 않는다는 밑줄 그어놓고 죽을때나 되서야 생각날 것 같은 탈무드 명언같은 이 삶의 아이러니를 이 단순한 농간에 대입하여 그대로 받아들여야하는 것 아닌가하는 생각이 불현듯 떠올랐다.

세상은 그렇게 불공정한 수레바퀴가 비극을 싣어오듯이 당신에게 갑작스럽게 다가와 모든 것을 가져갈 것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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