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2때. 18살때 가을 늦가을. 겨울되기 전
18살때 친해진 친구 한 명, 그리고 같이 놀던 친구 또 한 명이 이 영화를 보고 와서는 나보고 니 스타일이다고 침을 튀기며 말했던 올드보이. 희안하네. 그 애랑은 지금 전혀 서로 몰랐던것처럼 굴고 있으니, 사실 생각도 아예 안난다. 1년에 1번 생각 날까 말까한 그 애, 그 때는 그렇게 친하게 지냈는데. 우습다.
어쨌든 다른 한 명, 2년간 팥이랑 밀가루처럼 붙어다녔던 친구랑 우리 동네 극장에 보러갔지. 지금은 없어졌는데, 거긴 지하철이 지나면 의자가 덜컹 거리고 화장실에 간다는 핑계로 공짜로 무수히 많은 영화를 봤던 그 지저분하고 협소한 극장. 친구는 화장을 하고 나는 어른스럽게 입겠다고 차려입고 가서 한 말은 올드보이 두 장 주세요. 사실 떨렸다. 나는 겉으론 매번 괜찮아 괜찮아 쿨한척 하지만 속으론 엄청 떨고있는것이다. 심장이 두근거리고 표를 안주면 어떡하지하는 생각에 심장이 오그라들것 같았다. 나는 정말 이 영화를 보고싶단 말이야! 의심스러운 눈길로 한 번 바라본뒤에 표를 두 장 주더라. 1973년에는 영화값이 360원 정도 했더랬다. 내가 중학교땐 영화표값이 6천원이었는데 청소년은 5500원인가 5천원인가 그랬다. 올드보이는 7천원짜리 영화였다. 그 옛날에 멀티플렉스 시절이 도래하기전 단성사나 스카라, 명보, 피카디리가 흥행하던 시절에는 다이하드나 여름 성수기 블록버스터 영화가 나올때면 영화관람료가 500원 정도씩 오르곤 했다. 중학교에 다닐적에 학교에 미션 임파서블 바람이 불어닥친적이 있는데 그 때가 메가박스가 처음 생긴해였다. 나는 고딩때 멀티플렉스란 개념을 처음 접했지 중학교땐 무조건 지저분하고 작은 동네 극장이었다. 올드보이는 7천원짜리 영화였다. 극장 수입과 기타 이익들의 음모로 영화비가 7천원까지 올랐지만 조조 영화는 2천원에 볼 수 있는 시대이기도 했다.
그렇게 설레이는 마음을 끌어안고 영화를 본 나는 강한 충격에 휩싸였다! 17살 봄에 난 복수는 나의 것을 봤다. 쥐가 출몰하는 천호동의 극장에서 그 영화를 봤을때 나는 반칙왕에서 본 그 놈, 송강호를 봤던것이다. 아니 저사람 코미디 배우 아니었나? 복수는 나의 것은 일종의 문화 충격, 그 이상이었다. 세상엔 이런 영화를 만들어 극장에 거는 사람도 있구나. 두나는 키키의 모델에서 링으로 데뷔한 소녀도 아니었고 신하균도 공동경비구역에서 본 그 순진한 하사도 아니었다. 내가 영화란 매체에 매력을 느낀건 러브레터가 맞지만 영화 자체가 폭넓은 문화 경험의 신천지라는걸 깨달은건 박찬욱의 영화였다. 올드보이는 세간에서 시끄럽고 천박하게 떠들어댈만큼 괴상망측한 엔딩을 가지고 있었고 기존 상업 영화의 구조를 뒤집은 신선한 영화였다. 한국 영화 산업엔 쌈마이 영화와 임권택 영화뿐이라고 생각했던 나에게도 신선한 충격이었던 복수는 나의 것, 그 후로 1년 그는 올드보이를 만들어낸 것이다.
영화라는 매체가 놀라운 이유는 움직이며 말하는 사람들, 프레임 안의 구도와 총천연색뿐만 아니라 입체 음향등 다룰수있는 방식에 거진 한계가 없다는것때문이다. 때론 평면적인 텍스트나 그림들이 충격을 줄때도 있지만 난 아직도 영화만큼 다각도로 오감을 충족시키는 문화를 본 적이 없다. 올드보이는 새로운 시발점이었고 내가 학교에 더욱 정을 떼는데 한 몫한 영화이기도 하다. 겨울 방학때 나는 미술 입시를 하면서 다방면의 책을 섭렵했다. 그리고 10대의 마지막 해에 나는 페데리코 펠리니와 기타노 다케시를 알게 되었다. 그것은 그야말로 태양이 지구의 주위를 돌고 있다는걸 발견한 코페르니쿠스의 심정과 같았다. 나는 계속 어두운 동굴 속으로 들어갔고 이미 빠져나올수 없게 되었지만 돌아가고싶은 생각은 별로 없다. 열아홉살때 씨네코아를 처음 갔었다. 그곳이 없어지기까지 많은 영화를 그곳에서 봤고 스카라에서 마지막으로 본 영화는 사랑해 말순씨였다. 추억의 장소들이 점점 사라지고 변한다. 그래서 기를 쓰고 잊어버리지 않기 위해서 차곡차곡 기억해둔다. 그 날은 무슨 일이 있었는지, 누구와 어떤 대화를 나웠는지. 나에겐 소중한 보물들이기 때문에 내가 더 밤에 잠을 못 이루는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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