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운명이란건 정해져 있는게 아니고 니가 만들어가는거다라는 말들 많이 하지 않나 니 인생은 니 맘 먹기에 달렸다고 그리고 살다보면 기회는 여러번 오게 되어있다고 이런 이야기는 내가 이 영화를 보고 생각나서 한 소리는 아니고 그냥 이 야심한 밤에 잠이 안와 무한번뇌를 하느냐고 하는 말이고, 어찌되었건간에 구보씨에게 아들이라고 하나 있는데 이 아이가 게이다. 양복집을 하나 하는데 그 집 앞에 매일 개과천선 하자고 달려드는 종교쟁이 때문에 짜증은 늘어만 가는데 적적하던 차에 그에게 길녀라는 젊은 아주머니가 시야에 나타난다. 뭐 그러니까 사는게 오히려 복잡한게 아닐수도 있다는거다. 구보씨와 아주머니와 구보씨의 아들과 그의 남자 애인이 서로를 마주보고 식탁에 앉아 밥을 먹는게 그렇다는거다. 그게 어렵나? 그냥 서로 이해하면서 사는거지, 이런 운명이 있을수도 있고 저런 운명이 있을수도 있는거지. 그냥 가만히 앉아있다보면 굴러들어온 기회도 차버리는거구 이 운명에 종속되기 싫은데 귀찮다구 가만있음 그냥 그렇게 되는거지. 바루 그거란 말이지. 구보씨 아들은 당차게 커밍 아웃을 했고 구보씨도 여생을 비루하게 보내기 싫으니까 길녀에게 다가가는거다. 어렵게 생각할거 뭐있나, 마음 가는대로 그렇게 운명 만들면서 사는거지 뭐.



집요하게 비됴가게를 뒤져도 안나오는 독고탁 시리즈같은건 청계천이나 황학동에 이름 모를 업자에게서 이름 모를 테잎에 담긴 삐테입으로 구입하는게 정석이랄까. 어쨌든 이걸 구했다고쳐도 우리 아부지 철학상 집에 공중파 이상의 케이블을 달 수 없으며 집에서 공부 안하고 비됴나 보는 짓거리는 절대 안된다는 그것때문에 여즉 브이티알 하나 없는 집이 되었다. 그런고로 비됴테잎 하나 제대로 볼 수 없는 나는 이걸 어떻게 보느냐. 어쨌든 불법으로 구하게 된 가짜 vcd로 구질구질한 화면에 비는 내리고 아무튼간에 나 이걸 보고 펑펑 울었다지. 이건 83년에 나왔어도 독고탁은 70년대부터 어린이들의 희망이었는데- 나 이걸 보고 울어버렸단 말이지, 이게 옛날 만화답게 주인공한테 우여곡절이 겁나 많은데 독고탁이는 꿋꿋하단 말이지. 그게 정말 길에 핀 잡초보다 더 질기고 예쁘고 소중해서 눈물이 펑펑 나버렸단 말이지...아무리 내가 감수성이 예민하고 지금 이 시기가 더욱더 예민해서 눈물샘이 마르지 않는다해도 이 만화는 너무 감동이었어..제길..이런 만화를 만들고 말테야..나 말리지 말어..










french house duo



개늑시. 개와 늑대의 시간. 그 드라마 보고 혁권님 생각때문에 은하해방전선을 오랫만에 다시 보았는데 완전 다른 영화처럼 느껴진다. 이게 이렇게 달달한 멜로 영화였나? 울지마 영재야 라고 은하가 말한다. 이제 내가 열심히 들어준다고 말하는 영재. 와 눈물난다 눈물나. 김중배의 다이아때문에 수일씨를 버린 순애씨보다 더 눈물나. 그래도 하루에 삼천원씩은 꼭 준다던 영재야 그 다짐 변치않기를 바래/ 그리고 어딘가에서 은하는 그림도 그리고 연애도 하고 마음 통하는 남자랑 대화도 잘 하고 있겠지?



이 영화 왜 뛰어날까? 시놉이나 내용 아무리 봐도 다른 신파 멜로와 다를게 없는데 왜 뛰어나다고 생각해?
아주 오래전에 온 위문 편지같은거 있잖아, 군인들이나 아픈 사람들에게 보낸 편지에 답장받은거 당시에는 기쁘고 놀라워서 소중히 간직했는데 시간이 지나니까 그 편지가 어디에 있는줄 모르는거야. 그런데 이사를 가려고 짐을 정리하다 편지를 발견한거지 하얀 봉투는 누렇게 변했고 귀퉁이는 꾸겨지고 찢어지고..그 때 느꼈던 설레임이 다시 생각나는거야, 낯모를 사람과 주고받은 서신. 그런 느낌이었어 이 영화를 보았을때. 내가 아는 어떤 분은 이 영화를 돈 내고 몇 십번을 볼 정도로 좋아하고 나만 해도 dvd 케이스에 도로 집어넣지 못할 정도로 많이 보게 돼. 왜일까? 컨퓨즈라는 단어는 보통 혼란스럽다 분간안된다 이럴때 쓰는 말인데 국어의 아련하다와 같은 느낌으로 쓰여. 근데 이게 완전히 달라. 아련하다. 아련하다. 말들론 많이 하지만 이 아련하다는 말조차도 아련해질 정도의 느낌이야 금발의 초원은. 영화를 보거나 사람을 생각할때 느껴지는 색깔들을 떠올리자면 짜릿한 붉은색 어두운 검정색같은게 있잖아. 금발의 초원은 아주 옅은 노란빛이야 거의 흰색에 가까운 밝고 투명한 빛이지.
그래서 볼 때마다 가슴 한구석이 저릿저릿해졌다가 뙤약볕에 오랫동안 노출된 사람처럼 현기증이 날 것 같고 그러다가 또 설레여. 이게 대체 어떤 느낌일까? 우린 누군가를 떠올릴때 이런 느낌 받을수 있을까? 난 없어 한번도, 그래서 있었으면 좋겠어. 금발의 초원은 단어로 정리하기엔 말이 모자라, 그래서 계속 몇 번이고 멍하니 보게 되잖아 나는 이 영화가 이누도 잇신이 만들어낼수 있는 감정의 최극단이라고 생각해



어제 눌이가 어글리 우먼 얘기를 해서 내가 분명히 그 영화 가지고 있는거 같아서 무수한 CD더미를 뒤지다가 차녕이가 네 무덤에 침을 뱉어라 얘기한게 생각나서 그 영화도 있나 하고 찾아보았는데 있더라. 그래서 무심코 돌려서 보다보니 외모 지상주의에 일침을 가하는(?) 의도가 조금 빗나가 우스꽝스런 컬트 영화가 된 어글리 우먼하고 내용은 다르지만 요지는 비슷한것 같았다. 두 영화의 나이차가 자그마치 20년이지만 따지고 보면 여자들이 복수하는 내용이니까..그렇게 되면 복수의 립스틱이나 애꾸라 불린 여자, 멀게는 수라설희 오바해서 프리즈 미까지 모두 한 가족 아니겠는가. 그렇게 또 영화 삼매경에 빠져있다가 한달전에 보고 펑펑 울고 불고 생난리를 쳤던 우리집에 왜 왔니와 겹치는 영화의 이름이 드디어 기억났다. 아네스 바르다의 방랑자였다. 얼마전 아이공에서 회고전을 해서 봤음에도 불구하고 생각도 못했던 것이다. 2년전에 자크 드미와 아네스 바르다의 세계에 풍덩 빠져 영어 자막도 없는 영화를 보느냐고 진땀을 뺏었는데..
그녀와 꼭 닮은건 아니더라도 내용면에서 일맥상통하는 부분이 많다. 최근 한국 영화의 대세는 어디선가 본듯한 고전 영화의 이미지와 겹치는 웰메이드인가? 박쥐도 떼레즈 라깽이다해서 소설이 더 팔리는가본데 에밀 졸라의 소설과 박쥐는 많은 부분 다르다. 같은건 딱 하나, 여자의 주체적 욕망 실현이랄까. 오히려 닮은 영화가 있다면 뱀파이어 영화들이 더 닮았을걸? 김씨표류기나 지금,이대로가 좋아요의 이미지도 상당 부분 일본 영화들과 닮았다.
미쓰 홍당무란 영화가 메이저의 꼬리표를 달고 나올수 있는 여건이 되었다는건 대중들의 테이스트가 좀 더 다양해졌다는 것일까? 그럼에도 블록버스터나 스타 마케팅의 일환으로 후다닥 급조된 영화들이 '더' 대세인건 어쩔수 없겠지만 뜬금없게도 워낭소리가 독립영화 어쩌구 저쩌구 논란을 지펴준 탓에 1만명 들었으면 대박이었다고 입찢어졌을 똥파리가 몇일만에 2만이 넘은건 기적이고 운이었다는데 여지가 없다. 독립 영화고 대박 영화고 나 재능있는데 사람들이 안 알아줘, 내 영화 괜찮은데 사람들이 이해를 못해서 그래라구 불평하는건 딱하고 한심한 처사다. 사람들이 언제 과정에 신경이나 쓰더냐? 결과가 좋으면 다 좋다식의 주먹구구방식이 아직도 대중들의 회로에 깊게 박혀있는한 재능이고 천재고간에 보란듯이 보여줘야한다.
왜 아네스 바르다의 방랑자 예찬을 하려다가 또 독립 영화인들에 대한 걱정으로 변했느냐하는것은 내가 그들에게 느끼는 감정이 특별해서일지도..아직도 미련이 더 남았는지도..어쨌는지..인디 포럼 2009 감축드린다. 위기설이 흘러나왔던 몇 년전이 아주 옛날처럼 느껴진다. 아네스 바르다나 존 랜디스같은 감독들이 있는 유럽이나 미대륙과 한국이 어깨를 나란히 하지 못할 이유가 없다. 어깨 힘빼고 자의식 제거하고 맘비우면 좋은 결과물 좋은 과정 충분히 있을수 있다.
그러나 저러나 이 영화 강추다.



포스터만 봐도 꽤 구린 영화임을 알 수 있는 켄터키 프라이드 무비
로저 코먼에 비할바 아니지만 나름 80년대 메가히트 감독이었고 아직까지 지지층을 거느리고 있는 컬트 영화계의 레진드 랜디스와 80년대하면 빼놓을수없는 두 명의 핫라인 주커 형제의 초기 단결 작품인데 얼마전에 인고의 시간을 거쳐 구하게 되었다. 그래도 예전엔 나름 영자막으로 보면 해석이 빠릿하게 됬었는데 오랫동안 한글 자막으로 쉽게 보다보니 머리가 굳어버렸다. 나 생각하는 인간이기 싫은가보다. 도통 화딱지나서 못보겠다 흥엉어엉..이러다 내가 자막 만들판!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