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은 온다

셔커스

오슨웰즈의 마지막 로즈버드

오자크 시즌2

보디가드

우주를 누비는 쏙독새

7월 22일

키싱부스

루머의 루머의 루머 시즌2

시에라 연애 대작전

치아문



뭐 되게 많이 봣넹

리뷰는 천천히

,.,







티비 없어서 온에어로 볼려고 켰는데 저작권문제로 온에어 안해줌...

빡친다..................................................







도쿄의 밤하늘은 항상 가장 짙은 블루 내년초에 개봉한대요ㅠㅠㅠㅠ

덕자 n차각ㅠㅠㅠ최소 5번은 볼듯...

두근거리는데 뭔가 사랑이나 그런류의 감정이 아니라 무슨 일이 일어날 것 같은데 그 일이 불안해서 두근거리는 그 느낌. 그리고 무기력한데 또 희망적이고 그런 질긴 생명력의 영화. 작년 부산에서 보고 언제 개봉하나 개봉일만 기다렸는데 드디어. 드디어! 내가 10번 볼게!!

이시이 유야 사랑해! 이케마츠 소스케 사랑해!








의도하지 않았는데 커튼이랑 꽃이랑 같은색








그렇다 라고 말했지~




2018년 한 달 남았다
!!!






낭만을 품은 공산주의자이자 70년대 이탈리안 모더니즘을 이끈 사람. 어린 소년시절부터 시를 쓰고 언어, 오페라, 영화, 문학 등 다양한 분야에 대해 쌓은 지식과 교양으로 일찍이 예술에 대한 깊이가 남달랐던 사람. 관능적인 영화들 몇 개를 남긴 사람. 파리에서의 마지막 탱고에서 마리아 슈나이더와 협의없이 찍은 장면으로 최근 몇 년간 역겨운놈이란 소리 제일 많이 들은 사람..
바로잡자면 강간 장면은 대본에 있던 설정이었지만 세부 묘사들이 동의없이 촬영되었다고 밝혔다. 동영상을 올리구싶은데 꼴보기 싫은 사람이 많을 것 같아 텍스트로 대체.

Q : What exactly happened during the filming of the controversial sodomy scene in 1972's Last Tango in Paris?
A : "non-consensual" rape of Maria Schneider on the set.
"It was acting, it wasn't real,"
합의되지 않았다고 했다가 다시 번복했다가 결국 2013년 11월 페인버그와의 인터뷰에서 다시 번복함
"We had to shoot kind of a rape scene, so we decided to go with sodomy and butter, but I decided not to tell Maria because I was interested in her reaction,

대본에 있던 내용도 아니고 마리아가 불쾌하고 모욕감을 느꼈을거란건 알았다고 후회하는 뉘앙스로 말했고 사과는 했지만 쓰레기짓을 한 건 맞죠, 그 뒤로 이 영화를 다신 못 봤고 앞으로도 못 볼 것 같아. 그전에도 그닥 좋아하지도 않았고..그녀는 고작 스무살이었고 감독이랑 브란도는 중년의 남성이었는데 무섭고 창피하고 뭐 여하튼간에 말로 할 수 없는 참혹한 감정이 들었을 것 같다.,그녀의 삶에 애도를 보낸다.


그를 얘기할때 위대하고 훌륭하다고는 이제 더이상 말할 수 없지만 거슬러 올라가 베르톨루치가 남긴 영화적 유산을 추모의 의미로 들여다보자면..





우선 베르톨루치가 25살의 청년이었고 가장 순수한 심장을 가졌을 때 만들었던 작품인 [혁명전야] 그를 말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초기작이다. 불타는 사랑을 가슴에 품은 파브리지오는 베르톨루치의 또 다른 분신이었을 것이다. 사랑과 종교적 이데올로기, 신념 사이에서 고민하고 어른이 되는 과정을 담은 이 영화는 고작 만 24세의 청년이 만들었다고 하기엔 풍부한 철학적 사유들이 담겨있다. 영화에서 말하는 혁명은 개인의 성숙이자 삶의 변화였다. 아마도 그 당시 자신이 겪은 내적 변화나 갈등을 그대로 담았을 공산이 크다. 








6년 후 서른줄에 들어 만든 [순응자]는 내가 베르톨루치의 영화로는 처음 본 작품이었다. 장 루이 트리티낭이 연기했던 무솔리니 정권 치하에 비밀경찰로 활동하는 마르첼로의 순응된 삶을 따라가는 영화이다. 마르첼로의 유년시절은 평범하지 못했기에 정서적으로 불안했던 탓인지 성인이 되어서는 시대에 완벽힌 순응한 평범한 삶을 살고자한다. 시대의 뜻을 따르고자 하고 주어진 것들을 옳은 것이라고 생각하며 산다. 이 작품의 플롯은 다소 심플한 편이지만 미쟝센은 완벽 그 이상을 넘어선다. 70년대 뉴웨이브 영화들에 큰 영향을 준 순응자 속 소품과 의상, 건축물, 구도와 빛의 활용은 몇 십년이 흐른 뒤에도 화자될 정도로 모더니즘의 극치를 선사해준다. 영화의 모든 장면을 사랑한다. 순응자는 파시즘을 은유적으로 표현한 가장 아름다운 영화일 것이다.







포스트모더니즘이 무엇인가 의문이 든다면 보르헤스의 소설에 그 모든 것이 담겨있다고 설명하면 될 것 같다. 그런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의 소설 [배신자와 영웅에 관한 논고]를 토대로 베르톨루치는 [거미의 계략]을 만들었다. 소설은 상상력은 기억과 망각에서 온다는 보르헤스의 시간관을 그대로 담은 작품으로 사실 이 소설의 내용보다는 소설을 읽은 감상을 자신의 개념과 섞어 탄생한 작품이 거미의 계략이라고 보면 된다. 역사는 반복되고 어제의 시간은 오늘도 오늘의 시간은 내일에도 반복된다는 시간 개념과 모순된 자아를 효과적으로 연출하기 위해 지울리오 브로치가 마냐니와 그의 아들역을 모두 연기했다. 이 영화가 놀라운 점은 지금 현 세대를 살아가는 미시 파시즘을 시적으로 완벽하게 표현했다는거다. 베르톨루치는 지성의 비관을 택한 주인공과 그와 함께 실체하지 않는 진실을 그대로 덮는데 공조하는 마을 사람들을 통해 [모순]이라는 개념을 탁월하게 표현했다는거다.







72년 베르톨루치는 논란의 파리에서의 마지막탱고를 개봉시키고 후에 1900년이란 대작을 발표한다. (탱고는 개봉 당시에도 외설적인 장면들이 논란이 되어 X등급으로 심의되었고 개봉을 한 나라에서도 많은 장면이 잘려나갔다고한다. 지금봐도 까무러칠 정도인데 그 시절이면 파격의 파격의 파격이었던건 맞다.) 무려 5시간 20분짜리 영화다. 로버트 드 니로, 도널드 서덜랜드, 버트 랭카스터 등 꽤 이름이 익숙한 미국, 유럽 배우들의 젊은 시절 모습을 볼 수 있는데 어쩌면 파리에서의 마지막 탱고는 1900년을 만들기 위한 실험작에 불과했는지 모를 정도로 성애 장면에 공을 들였다. 
영화가 5시간이 넘다보니까 배급사에서도 개봉시키기 좀 껄끄러워했고 3시간-4시간 등 여러가지로 편집하는등 개봉에 꽤 힘들었다고한다. 영화내용은 역시 단순하다. 지주의 아들로 태어난 두 소년이 각기 다른 삶을 사는 것인데 그것이 파시스트와 코뮤니스트이다. 개봉당시에 공산당쪽에서 많이 지탄받았고 그 영향으로 당원까지 탈퇴하기에 이른다..파시즘의 지배를 받언 1900년대 초반부터 무솔리니 정권이 끝난 40년대 이탈리아를 다루는 1900년은 긴 러닝타임덕에 접근성이 좀 떨어지긴하나 베르톨루치의 세계를 이루는 혁명주의자의 낭만이 무엇인가 알기 위해 한번쯤 봐 둘 필요는 있다.







그 뒤로 몇 편의 이탈리아 영화와 다큐를 찍고 활동지를 헐리우드로 옮겨 찍은 첫 영화가 바로 베르톨루치의 작품 중 가장 대중적으로 유명한 [마지막 황제]다.  아마 이 영화가 베르톨루치 인생 가장 흥행에 성공한 영화가 아닌가한다. 우리나라에서도 88년 개봉 당시에 상당히 인기가 많았다고한다. 그도 그럴것이..마지막 황제인 푸이의 영화같은 스토리와 더불어 류이치 사카모토의 아름다운 음악, 그리고 베르톨루치의 완숙미의 절정에 다다른 연출과 오랜 시간 호흡을 맞춰 온 비토리오 스토라로의 카메라. 대중들이 상당히 좋아할만한 영화였다고 생각한다. 
이 이후로 몽상가들까지 사실상 내리막에 가깝다고 보면 된다. 북아프리카를 배경으로 한 [마지막 사랑], 키아누 리부스가 주연이었던 [리틀 부다], 내러티브는 부실하다 못 해 없는것에 가까웠지만 다리우스 콘지의 이탈리아 풍광 촬영과 리브 타일러의 미모만이 남은 [스틸링 뷰티] 등등 전부 혹평과 흥행실패를 면치 못한 범작과 망작을 오가다 2003년 사실상 자신의 커리어에 종지부를 찍은 [몽상가들]이 개봉한다.
68혁명이 일어난 파리를 배경으로 세 명의 청년이 서로의 일상에 관여하는 관능적인 드라마이다. 관능적인 세 사람의 관계 사이에 네 멋대로 해라, 시티라이트 등의 영화들이 교차된다. 60년대 가장 뜨겁고 순수했던 이성과 낭만을 가졌던 공산주의자이자 혁명가의 심장을 가졌던 20대의 베르톨루치 자신을 반추하며 그리고 자신이 사랑을 바쳤던 영화들을 되새기며, 혁명을 꿈꾸면서도 포근한 울타리에 갇히고만싶었던 세 청년의 모순된 상황안에 그 모든 것들을 몰아넣었다. 순수와 낭만을 그리는 것 같지만 그동안 베르톨루치 자신이 [순응자] [혁명전야] [거미의 계략]에서 보여준 순응자의 모순을 이 영화에도 녹였다는걸 알 수 있다.









이후 [미앤유] 라는 영화를 하나 더 만들었고 베니스 영화제 70주년을 기념하여 단편을 하나 찍었다.
그리고 내년에 신작이 하나 준비되어있었다고 했는데 결국엔 성사되지 못 했다.
60-70년대 이탈리아 영화에서도 빼놓을 수 없고 그 당시에 미국, 유럽영화에 상당한 영향을 끼쳤던 감독. 대단했던 감독이라고 생각한다. 천재였고 재능도 엄청난 사람. 쓰레기같은 짓을 한 건 사실이지만..추모는 하고싶다. 영화 남겨줘서 고마워 근데 천국은 가지마.













복수는 나의 것, 영화를 본지도 오래된 것 같고 신하균 젊었을때 찍었던 영화 중에 내가 제일 좋아하는 작품이라 큰 스크린으로 보구싶어서 오늘 무리해서 보고 왔다. 사실 영화가 너무 심플해서 더 이야기를 붙일 것도 없다고 생각했지만 오래 전에 봤을때랑 느낌이 사뭇 다르다는걸 느꼈다.

몇 년 전에 봤을땐 너무 단순했다. 누나의 수술을 위한 돈이 필요해서 돈만 받고 아이는 돌려줄 '착한'유괴를 결심한 프롤레타리아 청년 한 명과 사실상 세상에서 필요로하는건 누나와 여자친구뿐인 너무 단순한 세계를 가진 청년 한 명이 이 영화의 주요인물이다. 단순히 유괴가 잘못 되어 실수로 아이가 죽었고 그 사실을 알게 된 아이의 아버지가 유괴한 남자를 살해한다. 그리고 그 남자도 누군가에 의해 살해당한다. 사필귀정의 완벽한 결말이라고 생각했는데 여기에 아나키스트와 공장노동자의 가족이 전원 자살하는 것으로 인해 약간의 복합적인 감정이 생기게 되었다. 사실 상투적인 부분을 골라내라면 너무 많아서 오히려 영화가 전체적으로 그렇다라고 말할수도 있을 것 같다. 소리를 듣지 못하는 류와 아픈 누나, 그리고 그런 아무것도 없다 못해 마이너스인 남자를 사랑하는 아나키스트 영미라는 설정 자체도 너무 스트레오타입이 아닌가

아이가 부검당하는 모습을 바로보지 못하지만 류의 누나의 배가 갈리는 모습은 태연하게 하품까지 해가면서 지켜본다. 영화는 처음부터 모든 우연이 비극적인 결말을 유도하듯 드라이하게 흘러간다. 그리고 그런 흐름을 반증하듯 아픔에 신음하는 누나의 앞에는 소리를 듣지 못하는 동생이 음식을 섭취하고 있고 옆방의 네 마리의 짐승은 자기위로에 한창이다. 누군가에게 시작된 사소한 비극이 지극히 평범한 사람들의 일상을 뒤흔들고 미래를 바꾸어놓게된다. 자꾸 일이 안좋게 풀려간다. 퇴직을 당하게 되고 장기기증 사기를 당하게되고 결국 벼랑끝에 류를 몰아놓고 선한 의도따위 비웃는 것 같다. 착한 주인공은 없고 세상은 너무 냉혹하고 결국엔 피해자라고만 생각되던 사람도 결국엔 누군가에겐 가해를 한 사람이고..박찬욱 감독의 초기작이라 그런지 씬과 씬 사이의 연결들이 무자르듯 단호해서 너무 뜬금없는 것이 아닌가싶은 부분도 많다. 그래서 그런지 어느 주인공 하나를 붙들고 감정을 밀어넣기도 힘들지만 오히려 그게 하드보일드라는 장르에는 제격인거 아닌가하는 생각도 들 정도로 어느 하나, 누구에게도 동정심을 불어넣지 않는다.

모든 사람은 생명력을 잃은 물체들같고 영미의 죽음 이후에 서로의 집에서 서로를 기다리는 두 사람은 이제 복수의 의미조차 명확하지 않은, 삶에 지쳐버린 떠돌이 개가 되어버린 것처럼 보인다.

박찬욱의 다른 작품들에 비해 설익은 티가 많이 난다. 무정부주의 단체의 유일한 회원이라고 했지만 그녀의 유언대로 단체 조직원은 동진을 살해한다. 돌아가며 칼로 찌르는 의식을 치르고 사형선고 종이를 가슴에 붙인다. 영미라는 아나키스트는 이 유괴에 정당성을 부여해주기 위해 나타난 개념으로 보인다. 누나의 죽음은 아이를 죽게하고 아이의 죽음은 영미를 죽이고 영미의 죽음은 류와 동진이 서로를 증오하게끔 만든다. 그리고 테러단체의 등장은 이 영화를 상식밖으로 끌고 나가는데 한 몫 한다.

영화가 진행되면서도 나름 착하게 살았다고 항변하는 동진의 무표정한 얼굴과 용접공 가족의 죽음이 대치 되어 점점 아리송한 상태가 되어간다. 동진의 사적복수를 응원해야하는 것인가. 아니면 저 사람도 다른 가정을 무너트린 사람이니 본인의 죗값을 치르는 중이라고 비아냥거려야하는걸까. 어쩌면 이 모든 아이러니를- 인간은 생각한대로 살아지지 않는다는 밑줄 그어놓고 죽을때나 되서야 생각날 것 같은 탈무드 명언같은 이 삶의 아이러니를 이 단순한 농간에 대입하여 그대로 받아들여야하는 것 아닌가하는 생각이 불현듯 떠올랐다.

세상은 그렇게 불공정한 수레바퀴가 비극을 싣어오듯이 당신에게 갑작스럽게 다가와 모든 것을 가져갈 것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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